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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잠재적 장애인 / 이경훈(건축학부) 교수

  • 작성일 22.06.24
  • 작성자 고은나라
  • 조회수 519

 

장애인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인상 깊은 강의가 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설계사무소에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했을 때였다. 근사한 건물을 설계하게 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첫 일은 장애인 관련 건축물 규정을 숙지하는 일이었다. 건축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워크숍에 참가했는데 강사의 마무리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장애인입니다. 미래의 당신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십시오.” 장애인 관련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은 이 한마디로 지워졌다.

 

규정은 방대하고 구체적이며 엄격했다. 모자라도 안되지만 넘쳐도 안 됐다. 넉넉한 치수가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고 비장애인의 활동을 제약하는 일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계단으로 입구를 장식하는 것이 일종의 문법이었던 고전풍의 건물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미 지어진 건물은 유예가 되는 상황이었지만 서둘러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일이 많아졌다. 1990년 7월 통과된 미국 장애인법에 따라 소송이 벌어지면 패소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법은 선언적이라서 짤막했다. 모든 이들이 장애를 이유로 받는 차별을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종 갈등 역사가 있는 미국에서 ‘차별’이라는 단어는 금기어에 가깝다. 이처럼 미국의 장애인법은 차별 없이 비장애인과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공존의 공간을 만드는 데 주안점이 있다.

 

유럽은 나라마다 세부 규정에 차이가 있지만 인권, 특히 소통의 권리 측면에서 접근하는 성향이 강하다. 오래된 건물이 많으니 최대한 배려하되 강요는 하지 않으며, 신축의 경우에는 엄격하게 관련 규정을 적용한다는 정도다. 일본의 경우에는 94년 소위 ‘하트빌트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는데 급속한 고령화에 대한 대비의 성격이 짙다.

 

우리나라도 98년부터 관련 법률 시행에 따라 강제 조항으로 굳어졌지만,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세부 규정은 외국 사례를 참조하다 보니 여러 나라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인권보다는 친절과 시혜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상이 짙다. 몇 가지를 개선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장애인 시설 규정의 근본적인 출발은 차별 없이 함께 생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애인 화장실이나 입구는 분명한 차별이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같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모두가 정문으로 출입해야 한다. 짐이 잔뜩 쌓인 채 문은 고장 난 장애인 화장실을 볼 때마다 실효성은 없이 차별만 강화하는 규정이라는 우려가 인다. 화장실은 남녀 구분만으로도 충분하며 출입구는 하나면 된다.

 

둘째, 다양한 장애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휠체어를 타지는 않지만 보행에 불편한 경증의 사례도 있다. 계단이나 바닥의 디테일, 안전 손잡이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숫자가 훨씬 많다. 셋째로는 두 가지 장애를 위한 시설이 서로 방해가 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블록은 휠체어나 유모차에는 또 다른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경사면에서 요철은 아찔하다.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요철 블록은 다른 새로운 기술 적용을 세심하게 검토해봄 직하다.

 

다른 하나는 과잉 시설이다. 장애인 주차 구획부터 본 건물까지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로 연결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고 실제로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설치된 사례도 있다. 효과도 없고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어 미관을 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애인 시설의 첫째 철학은 차별 없는 공존임을 되새겨야 한다. 일반 생활 공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장애물 없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폭우에 누군가 혼자 휠체어를 밀고 있다면 달려가 우산을 받쳐줄 이웃은 어디에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모두 잠재적 장애인 아닌가.

 

장애인 시설은 베푸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우리가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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