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 신익희 선생 59주기 추모식 열려

  • 작성일 15.05.06
  • 작성자 조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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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의 초대 학장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신익희 전 국회의장 제59주기 추모식이 지난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묘전에서 열렸다. 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관용)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 본교에서는 김채겸 이사장, 임홍재 교학부총장, 윤종웅 총동문회장, 김인준 학생처장, 윤정국 노동조합위원장, 김정재 총학생회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추모식은 기념사업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약력보고, 그리고 서울지방보훈청장 및 광복회장, 대한민국헌정회장, 국민대 총장의 추모사에 이어 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유지수 총장은 교학부총장이 대독한 추모사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님은 광복 이후 민족사학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오늘의 국민대학교를 건립하신 후 “讀書不忘救國” “以校爲家”를 건학 이념으로 정하여 학구와 공사일치의 헌신을 강조하신 탁월한 교육선지자"였다며, "우리 학생들이 不忘救國, 實踐躬行을 강조하던 선생님의 유지를 따라 국가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하도록혼신을 다하여 교육하겠습니다."고 다짐하였다.

1892년 7월11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한 해공은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3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옮겼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고 그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해공은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했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또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피선됐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그해 5월5일 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해공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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